늘 중심에 있는 녀석이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면, 언제나 그 중심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 사람을 끄는 묘한 녀석이었다. 반에서 묘하게 겉도는 나와는 달랐다. 이목을 끄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녀석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떨어진 샤프를 주워 주던 그 녀석의 뒤로 비치던 것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봄 햇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녀석의 빛이라고 생각했다. 내밀어 진 손은 안중에도 없이 그 녀석이 웃는 얼굴만 멍청하게 쳐다보았고, 그게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되었다.

 

죽도록 후회한다. 나는 그 날, 그때, 웃는 네 얼굴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키리에

Jvic










“야, 최민호!”


등 뒤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무게감이 익숙했다. 자연스럽게 어부바 자세를 한 민호가 대뜸 얼굴 앞으로 내밀어진 초코 우유를 한 모금 빨아 마셨다. 하얀 손이 장난스럽게 민호의 입을 틀어막자, 민호는 아프도록 그 손가락을 깨물었다. 아아, 야, 아파! 우는 소리에 물고 있던 손가락을 놔 준 민호가 웃으며 등을 곧게 폈다.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소년이 결국 엉덩방아를 찧으며 떨어져 나갔다.


“아, 진짜 아파….”

“5초 안에 말 안 하면 안 들어 줘. 하나…”

“야, 나 진짜 아프다고.”

“어쩌라고. 둘, 셋, 넷…”

“아아! 나 수학 숙제 좀 보여 줘!”

“야, 김종현. 너 저번에 마지막이라고 빌려 갔었잖아.”

“이번엔 진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복도 바닥에 그대로 앉아 눈웃음을 살살 치며 부탁하는 종현을 바라보던 민호가 혀를 끌끌 차며 돌아섰다. 너 나 믿고 숙제 안 하는 거 모를 줄 아냐? 이번에는 안 돼. 너 같은 놈들은 제대로 혼나 봐야 정신 차려. 냉정하게 가버리는 민호의 뒷모습을 보며 허겁지겁 일어난 종현이 민호의 팔에 매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호는 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 민호야 한 번만. 어?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제발 한 번마안, 어? 어?”

“안 돼.”

“저녁에 치킨 사 줄게, 그래도 안 돼?”

“…안 돼.”

“두 마리 사 줄게! 너 혼자 다 먹어! 진짜로! 민호야, 친구야 제발….”

“…….”


작게 한숨을 내쉰 민호가 책상 서랍에서 노트를 꺼내 종현에게 건넸다. 보물이라도 되는 듯 노트를 손에 꼭 쥔 종현이 웃으며 민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민호야,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너 같은 친구를 둔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야. 난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종현을 떼어 놓은 민호가 자리에 앉았다. 쉬는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얼른 베껴. 민호의 옆자리에 앉아 급하게 숙제를 베끼면서도 종현은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오늘 야자 째고 우리 집 가서 치킨 먹자.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냐? 나 먹고 싶은 거 먹어도 돼? 뿌링클인지 뭔지 그거 맛있다고 그러던데 그거나 먹자. 나 그거 한 번도 못 먹어 봤어.


“네가 왜 먹어, 두 마리 다 나 먹으라며.”

“치사하게…. 그럼 세 마리 시키지 뭐. 그럼 되지?”

“그거나 얼른 해. 쉬는 시간 2분 남았어.”










“가방 왜 챙기냐? 야자 째려고?”

“걸리면 화장실 갔다고 해 줘.”

“석식도 안 먹고 그냥 가게?”

“응, 오늘 민호랑 치킨 먹기로 했어.”


혹시라도 담임에게 걸릴까, 바쁘게 가방을 챙기는 종현을 보던 태민이 힐끔 민호를 쳐다보았다. 혼자서 뭐가 그렇게 여유로운지 아직도 펜을 들고 있었다. 태민이 뚱한 얼굴로 종현을 보았다. 너 혼자 신난 것 같은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분명 금방 시무룩해질 게 뻔하니 할 수 없었다.


“너 요즘 최민호랑 잘 놀더라.”

“왜, 너랑 안 놀아 줘서 삐졌냐?”

“지랄하지 말고. 갑자기 최민호는 왜, 혼자 다니는 것 같아서 신경 쓰이냐?”


책을 챙길지 공부는 포기하고 실내화를 책가방에 넣을지 나름대로 심각하게 고민하던 종현이 태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종현은 왜 그런 걸 묻어보냐는, 다분히 의도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태민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묘하게 인상을 찌푸리던 태민이 종현의 손에 들린 책을 빼앗아 책상 서랍에 쑤셔 넣었다. 공부도 안 할 거면서 책은 왜 들고 있냐.


“난 최민호 마음에 안 들어.”

“왜?”

“그냥. 좀 음침하잖아.”

“…솔직히 그냥 잘생긴 거지.”

“얼굴만 잘생기면 뭐하냐? 음침하잖아. 맨날 혼자 다니고, 말도 잘 안 하고.”

“그거야 공부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거지. 새벽까지 공부한대.”

“너 왜 자꾸 최민호 편드냐?”

“그러는 너는 왜 자꾸 최민호 욕하냐? 쟤가 너한테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 몰라. 하여튼 최민호 재수 없어. 짜증 난다는 듯 이제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는 태민을 보던 종현이 웃으며 실내화를 책가방에 넣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을 해, 짜샤. 최민호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데 심지어 얼굴도 조온나 잘생긴 엄친아인 게 부러워서 짜증 난다고. 종현의 말에 발끈한 태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러운 거 아니거든! 종현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아니기는, 형은 네 마음 다 알아. 다 이해해.”

“키도 좆만한 게 형은 무슨.”

“내 키 좆만한 거 아니거든!”










친구 집에 놀러 간다는 것은 민호에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유치원은 다니지 않고 홈스쿨링을 했고, 초등학교 때부터는 학교가 끝나면 바로 학원행이었다. 그 덕분에 공부라면 언제나 일 등이었지만 친구는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학원을 그만두고 좀 나아지긴 했지만 민호의 어머니는 여전히 ‘엄마는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종현의 집은 생각보다 좋았다. 집이 크다거나, 비싸 보이는 가구가 많다거나 하는 그런 좋음은 아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나는 집 냄새, 분위기, 뭐 그런 것들이 좋았다. 민호는 의도치 않게 자신이 사는 집과 종현의 집을 비교하고 있었다. 이런 집에 살면 이런 애가 될 수 있는 거구나, 라고 생각했다. 민호에게 있어 종현은 좋은 친구이기도 하고, 동시에 속을 잘 알 수 없는 녀석이기도 하고, 때로는 미지의 생명체 같았다. 나와는 정 반대인 사람. 좋아하게 된 것도 어찌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사람은 반대에 끌리기 마련이라고들 하니까.


우리 엄마 오늘 이모들이랑 놀러 가서 아빠 퇴근 전까지는 집에 아무도 없어.

“너 누나 있다고 그러지 않았냐?”

“누나는 자취. 저기 내 방이야, 들어가 있어. 치킨 내 마음대로 시킨다? 뿌링클 먹어야지.


신이 나서 전단지를 뒤적거리는 종현을 보며 웃던 민호가 방으로 들어갔다. 평범한 남자 고등학생의 방이었다. 침대 위에 잠옷이 널부러져 있고, 책상 위에 지우개 가루와 샤프가 굴러다니는 평범한 방. 좀 특이한 게 있다면 책꽂이에 꽂힌 많은 책들과, 그 중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연예잡지였다. 무슨 남자가 이런 걸 보나, 싶어 하나씩 꺼내 보던 민호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뿌링클 좋아해?”

“너 정윤호 좋아하냐?”

“어?”

“표지가 다 정윤호길래.”


당황한 듯 머뭇거리던 종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윤호 좋아해. 나 정윤호 나오는 드라마 다 봤다? 이번에 나온 영화도 봤어. 너 그거 안 봤으면 같이 보러 갈래? 또 보고 싶은데. 민호는 평소와 다름없는 종현의 모습에서 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다른 점이 있었다. 분명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너….

“응?”

“너 왜….

“뭐가?”

“…아니야.”


뭐야, 나 씻고 올 테니까 여기 있어. 심심하면 잡지 봐도 돼. 민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 왜 평소랑 달라? 너 왜 정윤호 얘기하면서 그런 표정을 지어. 너 왜…. 너 왜 그렇게 나랑 같은 얼굴을 해. 하고 싶은 말을 묻어두고 잡지를 펼쳐 든 민호는 이상하게 찝찝하고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정윤호의 인터뷰가 있는 페이지. 교과서 보듯 인터뷰 내용을 천천히 읽던 민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Q. 이번 작품을 통해서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A. 그렇다. 제대 후 쉴 틈도 없이 촬영에 들어갔는데, 입대 전부터 늘 반항적인 캐릭터만 연기해 왔기 때문에 처음 이 작품을 고를 때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자 마음먹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고, 많은 분들이 호평을 해 주셨다. 어느새 서른을 넘었다. 언제까지고 반항적인 캐릭터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연기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 같아 만족스럽다. 잘 봐 주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Q. 캐릭터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실제 성격과의 싱크로율 때문에 더 화제가 됐다.

A.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동안 해 온 역할들처럼 반항적이거나 제멋대로인 적은 없었다.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반항이 배우가 되겠다고 한 일이었다. 실제 성격은 아무래도 이번 작품 속 캐릭터와 더 비슷한 것 같다. 무뚝뚝하지만 자상하려고 노력하고, 여자에 별 관심 없고. 하하.


Q. 서른을 넘긴 나이에 이성에게 관심이 없다니 놀랍다. 결혼 생각은 없나.

A. 이상하게 예전부터 그랬다.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살게 되겠지만 아직은. 연애나 결혼보다는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이나 옆집에 사는 꼬맹이와 놀아주는 일이 더 좋고, 편하다. 옆집에 사는 꼬맹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봐 왔다. 그런데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 됐다. 요즘에는 그 녀석 커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에 산다.


Q. 단순히 옆집 꼬맹이얘기를 하는 사람치고는 표정이 너무 좋다.

A.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다. 친형 혹은 부모의 마음인 것 같다. 아기 때부터 그렇게 울다가도 나만 보면 울음을 그쳤다. 그래서 더 정을 많이 줬다. 실제로도 내가 똥 기저귀를 갈았고, 심하게 우는 날에는 업고 동네를 돌기도 했다. 유치원, 초등학교 입학식 날도 내 손을 잡고 갔다. 거의 공동 양육자 수준이었다. 입대할 때도 어머니보다 그 녀석이 더 많이 울었다.


Q. 지금 이 순간 많은 여성들이 꼬맹이에게 질투를 느낄 것 같은데.

A. 하하. 그럴 필요 없다, 그 꼬맹이는 남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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